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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흑해곡물협정의 의의와 중동부유럽 국가들에 미치는 영향

중동부유럽 일반 Levi Nicolas Vistula University Lecturer 2023/06/08

You may download English ver. of the original article(unedited) on top.

서론
2022년2월 24일에 개시된 러시아의 명분 없는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례를 찾기 힘든 지정학적 격변으로 국제 사회의 제반 여건과 국제관계의 성격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전까지 밀, 유채, 보리, 식물성 유지, 옥수수 수출 규모에서 세계 1위였던 우크라이나는 개전 이후 작물 수확 및 수출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생산량 감소, 생산비용 증가, 공급망 교란, 수출 단가 하락에서 비롯된 우크라이나 농업 부문의 간접적 피해는 2022년 6월을 기준으로 약 233억 달러(한화 약 31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Cherevko 2023: 12).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의 침공은 세계 식량안보에 대한 위협이기도 한데, 이는 국민소득과 식량 공급량이 모두 부족한 상태에 있는 세계 각지의 식량 수입국 중 다수가 자국 내 수요 충당을 우크라이나산 작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인해 식량안보가 심각한 수준으로 저하된 국가들뿐만 아니라 레바논이나 튀니지와 같은 국가들도 우크라이나산 밀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다(Al-Saidi 2023: 2).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많은 국가들이 현재 자국민 식량 수요 충족을 위한 대체 공급원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세계 농산물 시장에서 우크라이나의 입지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 바구니’라고 불려왔을 정도로 비옥한 영토에서 많은 곡물·유채 등을 생산하고 상당량을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로 수출해 왔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5년간 세계 밀 생산량의 평균 10%가량을 담당했고(Eisele 2022), 밀 수출량에서도 세계 5위의 실적을 기록하여 밀이 주식인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을 비롯해 세계 밀 시장의 핵심 공급국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보리와 같은 여타 식용 작물의 생산·수출량도 많다. 우크라이나가 수출하는 보리는 세계 수출 총량에서 20%를 차지해 세계 4위, 해바라기유 수출량은 25%로 세계 1위이며, 우크라이나산 옥수수의 생산량은 세계 시장의 3% 미만이지만 수출량에서는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Mustafa 2022: 1).

이처럼 세계 농산물 시장에서 우크라이나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러시아의 침공은 농산물의 생산과 소비 모든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수준의 장기적 악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또한 군사작전이 진행되는 지역에서의 작물 수확이 어려워지고 수출용 항구나 농산물 관련 설비의 일부도 가동이 중단되면서 우크라이나산 곡물과 유채의 생산 및 수출량이 감소하여 전 세계 식량·사료 가격이 급등하기도 했다.

자국 내 곡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해외로 수출하는 우크라이나는 수출 물류망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의 침공 이전까지 우크라이나산 농산품 수출량의 90% 이상은 아조프해와 흑해에 위치한 항구를 통해 국외로 운송되었지만, 현재 이 항구들은 러시아의 불법 점거 하에 놓여 있어 기존 용도로의 활용이 불가능하다. 항구를 제외한 도로, 철도, 운하 등 나머지 수출품 운송로는 항구만큼의 물동량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의 수출량이 전쟁 이전 대비 20% 수준으로 급감한 것으로 추산한다(Barnley 2022). 여기에 더해 제품 보관이나 가공을 위한 시설 중 일부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점 또한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수출에 큰 장애요인이 되었다. 

러시아의 침공이 가져온 또 하나의 중대한 악영향으로는 전 세계적인 식품 가격 급등을 들 수 있다. 식량농업기구(FAO)가 집계하는 식품가격지수는 2022년 3월에 159.7까지 치솟으며 지난 199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고, 특히 식물성 유지나 식용작물의 가격 상승폭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평균소득이 적고 식량 공급이 충분하지 않은 국가에 거주하면서 식량 구매에 소득의 많은 부분을 지출하는 취약계층 인구의 경우 이러한 식량 가격 상승으로 인한 악영향에 특히나 더욱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흑해곡물협정의 타결과 시행 
러시아가 2022년 2월 개전 이래 군함을 동원해 흑해 항구를 4개월 이상 봉쇄하면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에 동년 7월 22일 유엔(UN)과 튀르키예가 주도한 유관국 간 협상을 바탕으로 흑해 상에 우크라이나산 곡물 운송을 위한 인도주의적 회랑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흑해곡물협정(Black Sea Grain Initiative)이 체결되었다. 해당 협정은 초르노모르스크(Chornomorsk)항, 오데사(Odesa)항, 피우데니(Pivdennyi)항 등 우크라이나의 3개 항구에 적용된다. 이 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이스탄불(Istanbul)에 신설된 합동조율센터(JCC, Joint Coordination Center)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튀르키예, UN에서 각각 파견한 대표로 구성되고, 대상 해역 내 상선의 이동을 모니터링하고 우크라이나 소재 항구를 거치는 물품의 운송이 협정에서 규정된 절차를 준수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우크라이나산 곡물과 식량, 비료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흑해곡물협정이 시행된 이래 총 2,800만 톤의 곡물과 식량이 1,600회의 해상 운송편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에서 해외 45개국으로 운송되었고, 이는 세계 식량 가격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식량계획(WFP) 또한 본 협정 체결 이후 50만 톤 이상의 밀을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1) 지역, 예멘 등지로 운송해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에 투입했다. 통계에 따르면 흑해곡물협정 아래 이루어진 밀 수출량의 65% 이상은 개도국으로 운송되었고, 옥수수의 경우 선진국과 개도국 대상 물량이 각각 절반 정도의 비중을 보였다.

흑해곡물협정은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수출로를 열어주기 위해 마련한 연대회랑(Solidarity Corridor)과 함께 식용작물을 중심으로 2022년 3월에 고점을 찍었던 세계 식량 가격을 안정화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본 협정은 2023년3월 19일에 재차 갱신되었고, 5월 17일 추가 갱신에 합의하여 7월까지 연장되었다.

흑해곡물협정이 중동부유럽 지역에 미친 영향: 각국 농민의 반발과 정부의 회유책
EU는 흑해곡물협정에 의거해 2022년5월을 기해 우크라이나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에 대한 관세를 면제하고, 개전 이래 우크라이나에 쌓여 있던 식량 재고의 수출을 지원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다만 이 때문에 EU 내부 상품보다 단가가 저렴한 데다 관세도 면제되는 우크라이나산 옥수수, 밀, 해바라기씨 등의 상품이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 인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각국 농민이 여기에 반발해 시위에 돌입하고 폴란드 농무장관이 사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흑해곡물협정 시행 이래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중동부유럽의 곡물 시장에 나타난 변화는 상당한 수준이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의 수출액 규모는 폴란드를 대상으로 1,400만 달러(한화 약 180억 원)에서 6억 4,600만 달러(한화 약 8,500억 원)로, 헝가리를 대상으로 800만 달러(한화 약 110억 원)에서 4억100만 달러(한화 약 5,300억 원)로 각각 급성장했다(Kraiev: 2023).

하지만 수입 농산물의 대량 유입에 반발한 중동부유럽 국가들 내 농민 단체들이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자, 폴란드의 경우 2023년 4월 17일을 기해 곡물을 비롯한 여러 식품류2) 의 수입을 금지하는 규제를 새로이 시행했다. 폴란드 정부는 여기에 더해 시장에 풀린 곡물을 시가의 두 배 가격에 매입하고 비료업계에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자국 농민을 달래기 위한 정책을 도입했다. 비록 폴란드 당국은 이러한 조치와는 무관하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 의사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우크라이나 농업정책부(Ministry of Agricultural Policy) 장관은 폴란드 정부의 결정을 즉각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 농민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폴란드 농민에 비해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폴란드 정부의 사전 통보 없이 언론보도를 통해 관련 조치를 인지한 EU 집행위원회도 EU 시장 전체에 영향을 주는 사안에 대한 결정을 회원국이 독단적으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폴란드 측에 주지시켰는데, 이는 폴란드 정 부의 결정이 EU 법령과도 충돌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폴란드 정부의 결정과 관련된 법적 문제로는 ▲EU 차원에서 시행한 우크라이나산 상품 관세 면제 정책이 회원국에 이처럼 일방적인 수입 금지를 급작스레 단행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 ▲상품 수입의 전면 금지가 EU의 통상 원칙에 반한다는 점 ▲폴란드 이외에 우크라이나산 식용작물 수입 제한 조치를 시행하는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의 경우 제한 대상품의 자국 경유 이송을 최소한 조건부로 허용하고 있다는 점 등이 있다.

EU는 현재의 민감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각국 정부의 임시 수입 제한 조치를 승인하고 있다. 지금까지 EU 집행위원회가 공개한 방안은 각국 농민에 보상금을 지급하고(Pronina: 2023) 우크라이나산 밀, 옥수수, 해바라기씨, 유채 등 곡물이 여타 EU 회원국이나 외부 국가 수출용일 때에만 상기 5개국 경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폴란드가 개전 이래 우크라이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 국가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주로 지방에 권력 기반을 둔 강경보수 성향의 폴란드 집권여당 법과정의당(PiS)은 2023년 가을에 예정된 의회 선거를 앞두고 농민들의 표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슬로바키아도 폴란드와 유사하게 9월 30일에 선거를 치를 예정이고, 헝가리의 경우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인 기조를 경제 정책 전반에서 꾸준히 표출해 왔다.

결론: 흑해곡물협정의 미래와 시사점
전쟁으로 인한 우크라이나의 위기가 이미 국제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 허용을 둘러싼 협의는 교전국 간 군사적 공방의 이면에 전개되는 외교·경제적 알력싸움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러시아는 자국의 요구사항이 부분적으로나마 관철되지 않을 경우 2023년 5월 중순의 차기 협상에서 흑해곡물협정 기한 갱신을 거부하는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했다. 러시아가 제시했던 요구사항에는 ▲러시아산 비료 수출 제한 철회 ▲러시아 농업은행(Russian Agricultural Bank)의 국제 스위프트(SWIFT) 결제망 복귀 ▲러시아에 대한 농업용 기계장비 및 부품 공급 재개 ▲러시아 선박의 해상보험 가입 및 외국 항구 기항 권리 회복 ▲농업 부문 러시아 기업 자산의 동결 해제 ▲톨리야티(Tolyatti)와 오데사를 잇는 파이프라인 운영 재개 등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러시아가 곡물협정 갱신을 거부할 경우 우크라이나산 식량 수입이 절실한 아프리카 등지 국가들로부터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점이 압박 요소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료 예정일 하루 전날인 5월 17일 흑해곡물협정 연장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한편 흑해곡물협정 타결 이래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유입에 대한 인접국의 반응은 전후 우크라이나의 EU 회원국 지위와 관한 미래의 불확실성을 늘리는 요소이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EU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된다면 우크라이나산 상품이 EU 공동시장에 대규모로 풀리게 되는데, 지금도 우크라이나산 곡물 및 식량에 수입 금지 조치를 취하고 있는 중동부유럽 국가들이 이러한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 각주
1) 아프리카 북동쪽 소말리아 반도 인근 지역을 일컫는 말로, 에트리티아, 에티오비아, 소말리아, 소말릴린드, 지부티 등위 위치해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수단과 케냐까지 포함된다. 
2) 적용 대상: 곡물, 설탕, 건조사료, 종자, 홉, 아마·헴프(flax and hemp), 과일·채소 및 가공품, 와인, 소·돼지·양·염소고기, 우유 및 유제품, 계란, 가금육, 농산물 원료 에틸알코올, 벌꿀 및 가공품 (Rozporządzenie ministra rozwoju I technologii 1 z dnia 15 kwietnia 2023 r. w sprawie zakazu przywozu z Ukrainy produktów rolny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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